[경인지역 4.3순례 동행취재](중) “살기 위해 도망친 한라산, 붙잡혀 형무소 간 형님의 생사 모릅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저는 제주 오도롱 마을에 살았습니다. 4.3 당시 집을 불태워버리니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도망갔죠. 그러다 붙잡히게 돼 첫째 형님은 총살당하고 둘째 형님은 형무소로 보내진 뒤 감감무소식입니다.”

4.3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전국 형무소로 붙잡혀간 이들. 형기를 마치고 출소,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대부분은 생사도 모른 채 행방불명됐다. 

21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현 서울서부지방법원),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열었다. 순례는 제주4.3유족회 경인위원회가 주관했다.

제주시 이호동, 오도롱 마을에 살았던 김덕림(84) 어르신은 경인지역 4.3행불인 형무소 순례팀을 찾았다. 제주에서 함께 출발한 것이 아니라 순례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합류하게 된 것. 

서대문형무소부터 마포, 인천형무소까지 순례 일정을 함께한 어르신은 유족들을 보며 자신 가족이 겪은 먹먹한 4.3당시 이야기를 풀어냈다. 

집이 다 불타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어르신 가족은 생명에 위협을 느껴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향했다. 약 6개월간 한라산에서 머물던 와중에 토벌대에 붙잡혀 끌려온 어르신 가족의 비극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제주시 이호동 오도롱 마을에서 살던 김덕림 어르신은 4.3 당시 아버지와 첫째 형님을 잃고 둘째 형님마저 행방불명된 아픔을 겪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시 이호동 오도롱 마을에서 살던 김덕림 어르신은 4.3 당시 아버지와 첫째 형님을 잃고 둘째 형님마저 행방불명된 아픔을 겪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3행불인을 기리고 있는 순례 팀.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3행불인을 기리고 있는 순례 팀.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아버지와 첫째 형님은 한라산에서 잡힌 뒤 총살당했고, 둘째 형님 김응림(당시 19)은 인천형무소로 징역 7년형을 언도 받고 수감됐다. 이는 나중에 인천형무소로 향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어르신은 둘째 형님의 생사를 지금도 알지 못한다. 6.25 당시 형무소에서 병사했다는 소문이나 출소한 뒤 어디론가 갔다는 소문이 들려왔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사망했다면 시신이라도 거둘 수 있었으면 했지만, 여전히 73년 전 그대로다.

김 어르신은 “4.3에 대해 제대로 말할 길이 없었다. 4.19 때나 5.16 때 누가 4.3을 언급할 수 있었겠나. 이데올로기에 묶여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며 “이런 행사에도 참여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못해왔다. 그동안 참여하지 못한 것에 죄송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마포형무소 앞에서 아버지로부터 듣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풀어낸 강상옥(74) 씨는 4.3생존수형인 유족이다. 그의 아버지는 마포형무소로 끌려간 뒤 산전수전을 겪은 뒤 살아 돌아와 얼마 안 있다 돌아가셨다.

제주시 월평동에 살고 있던 강 씨 가족은 한라산 피신 생활 중 선무공작에 속아 해안으로 내려온 뒤 제주항 옛 주정공장에 끌려갔다. 

당시 강 씨 어머니는 뱃속에 강 씨를 품고 있었고, 주정공장에서 출산하게 되자 석방됐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강 씨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형무소 문을 연 북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강 씨는 “당시 아버지가 24살이셨는데 조국 통일을 위해 싸워야 한다며 끌고간 인민군에 의해 총알받이가 됐다”고 말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국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지리산에 숨어 살다 어느 할머니 아들로 호적을 옮긴 뒤 육군에 입대, 병장으로 제대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시 월평동에 살다가 4.3 당시 한라산으로 피신, 선무공작에 속아 내려온 강상옥 씨 아버지는 핏덩이 아들을 두고 마포형무소로 끌려간 뒤 산전수전을 겪고 어엿하게 자란 아들을 본 지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 앞에 제사상을 마련한 뒤 4.3행불인 영령을 기리고 있는 유족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 앞에 제사상을 마련한 뒤 4.3행불인 영령을 기리고 있는 유족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기구한 삶을 산 강 씨 아버지는 10년이 흐른 뒤 정세가 안정되자 그리던 고향 제주로 향했고, 어느덧 훌쩍 커버린 고등학생, 중학생 아들을 맞이한 지 3년여 만에 몸이 아파 돌아가셨다.

강 씨는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이 있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제주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에 가면 죽을 것을 알아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다”며 “그러다 보니 북한으로도 가고 행방불명된 분들이 많이 계신 것”이라고 말했다. 

형무소에서 숨진 희생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어 생사도 모르는 상태다. 이 때문에 살아남은 가족들의 가슴 한편에는 지워지지 않는 응어리진 한이 맺혔다.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한 ‘군법회의 명령’에 따르면 당시 재판에 회부돼 수형 생활을 한 사람은 그 수만 2530명에 달한다.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서울과 인천, 대전, 대구, 전주, 목포 등 전국 각지 형무소로 분산 수감돼 수형 생활을 했다. 

이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열악한 형무소에서 옥사하거나 6.25 한국전쟁 당시 불순분자 처리 방침에 따라 총살당하기도 했다. 

억울하게 끌려간 것도 모자라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던 이들.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의 재심 청구에 따라 이들 중 일부는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피해자들이 많기에 제주사회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관심이 요구된다. 이데올로기 대립 아래 자행된 국가폭력의 가장 큰 피해지역 제주. 모두의 관심이 이어질 때 해원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어느 유족의 말이 떠오르는 지금이다. / 인천=김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