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주 체육 선도한 한국탁구의 거목 백명윤 고문(1)
작성자 정보
- 작성자 제주일보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조회 1,424
본문
- 김재범 기자
- 승인 2020.10.18
서울제주도민회장·재외제주도민회 총연합회장 각각 역임
제주서 국제대회 유치·장학생 지원 등 제주 알리기 ‘노력’
백명윤 ㈜팩심인터내쇼날 회장(75)은 제주 체육을 선도한 탁구 선수에서 한국탁구를 이끄는 거목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면서 사업가로 변신해 성공했고, 서울제주특별자치도민회장과 재외제주특별자치도민회 총연합회장을 역임하고 고향 제주 발전에도 기여했다.
현재 재단법인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모험심 강한 학창 시절
백명윤 회장은 1945년 4월 28일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듬해 가족들이 제주로 귀향하면서 제주시 남문통(삼도1동)에서 거주했다. 제주남초등학교 시절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부딪혀보는 모험적인 아이였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줄곧 반장과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다. 제주제일중에 진학해서도 3년 동안 반장을 하며 우등상을 탔었다.
▲‘탁구 제주’ 전성시대 열다
동네 형들이 집 마당에 드럼통을 놓고, 그 위에 부엌 문짝을 얹어 탁구 하는 모습을 보며 배우기 시작했다. 제주제일중 입학 후에는 체계적으로 훈련했다.
그 결과 전국대회 중 가장 권위가 있는 전국체전과 종별 선수권 대회 등에서 메달을 휩쓸며 전설적인 ‘탁구 제주’의 역사를 일구어냈다.
1961년 제42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남중부 개인 복식에 출전, 김남익과 한 조를 이뤄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제주 체육사상 전국체전 최초의 금메달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또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지금도 ‘제주체육사 금메달리스트 1호’라는 자부심에 스스로 감사하고 있다.
제주제일고에 진학해서도 1963년 제44회 전국체전 단체전을 거머쥐는 데 기여했다.
특히 같은 해 제9회 전국종별탁구 선수권대회에서는 개인 단식 1위를 비롯해 개인 복식(백명윤-김남익), 단체전(백명윤, 김남익, 현승탁, 강정민, 고윤성)까지 전 종목을 휩쓸며 3관왕의 기쁨을 누렸다. 섬 출신들의 금메달 싹쓸이는 기적과도 같았다.
▲대학과 실업팀 선수 생활
그는 고교 졸업 후 제주를 떠나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전국 고교 최강이었던 제주제일고 졸업 예정 선수들을 주축으로 탁구단을 창단하겠다는 제안을 해온 경희대학교에 둥지를 틀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한국 실업 최강팀인 전매청에 스카우트 제의로 입단했다. 그 후 2년이 지나 전매청 소속 몇몇 선수들을 주축으로 공군팀이 창설됐다. 공군팀은 전매청팀과 쌍벽을 이루며 한국 탁구를 주도해 나갔다.
▲사업가로의 변신
그는 1971년 2월 27일 공군을 제대하면서 선수의 임무를 마치자 탁구 라켓을 미련 없이 부러뜨렸다. 탁구와 완전히 절연한다는 나름의 결기를 표한 것이다.
당시의 암울한 국내 정치·안보 환경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원정 경기를 갔을 때 오사카에서 살고 계신 먼 친척이 응원하러 숙소로 찾아와 대화 과정에서 ‘동무’라는 말을 여러 번 꺼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총련계 친척과 상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낙인이 찍히는 시대였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돈을 벌어 기울어진 가세를 바로 세워보자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제대 후 다행히 원하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익혀둔 영어 공부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15년간 국제그룹을 비롯한 몇몇 무역회사에 다니며 실무를 익혔고, 해외 세일즈 경험도 쌓았다. 1983년 12월 무역회사인 ㈜팩심인터내쇼날을 창립했다. 유럽을 주요 시장으로 국산 제품들을 수출했다. 세계 20여 개국을 쉴새 없이 드나들며 내실을 다지고 있다.
▲한국탁구 외교와 꿈나무 육성
그가 한창 사업에 집중할 때 많은 탁구 선배들이 탁구계 복귀를 요구해왔다. 한국 탁구를 위해 뭔가 할 일이 있고, 또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9년 한국실업탁구연맹 부회장으로 영입됐지만 2년 후 스스로 사임했다. 실업연맹은 국가대표를 비롯한 탑클라스의 기성 선수들이 있는 집합체라 딱히 역할이 필요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1년 한국초등학교 탁구연맹 회장으로 추대, 13년간이나 맡았다. 한국 탁구의 미래는 꿈나무 육성에 달렸기에 보람된 일이라 생각했다. 1992년은 가장 자랑스럽고 보람 있는 일을 해낸 해로 기억했다. 초등학교 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국제대회 ‘동아시아 호프스 탁구 선수권대회’를 창설한 것이다.
1992년 8월 제1회 동아시아 호프스 탁구 선수권대회는 일본 오사카에서 막이 올랐다.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마카오, 몽골 등 8개국이 참가한 성대한 대회였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 어린이들이 만났다. 서로 긴장된 모습이었다. 경기장에는 조총련에서 동원시킨 조선학교 학생 수백 명이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한반도기를 흔들며 남북 어린이들을 응원했다. 일본의 NHK도 이 역사적인 현장을 생중계하며 남북 어린이들의 경기를 소개했다. 나흘 동안 각국의 어린 선수들은 탁구를 통해 맘껏 우정을 나눴다.
남과 북 선수들은 폐회식 파티 행사에서 함께 손을 잡고 단상에 올라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합창했다. 모든 참가국 대표들이 이렇게 뜻있는 꿈나무대회가 끊임없이 이어지길 희망해 왔다. 지금까지 28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아시아탁구연합(ATTU)이 인정하는 세계 유일의 초등학생 국제대회로 뿌리내렸다. 그는 1997년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 1998년 국제탁구연맹미디어위원, 2001년 대한탁구협회 부회장(국제위원장), 2003년 아시아 탁구연합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탁구의 부흥기를 이끌기도 했다.
▲국제대회 제주 유치
그는 고향 제주를 위해 국제 대회를 세 차례 유치, 제주가 탁구의 메카로 부상하는 데 힘썼다. 주요 대회는 2000년 8월 제9회 동아시아 탁구 선수권대회, 2003년 5월 폭스바겐 코리아 오픈 국제대회, 2005년 8월 제17회 아시아 탁구 선수권대회이다. 아시아 탁구선수권 대회는 1964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후 41년 만에 한국에 유치, 34개국 선수와 임원들이 참가한 제주 체육사상 최대의 국제대회였다.
또 1991년 한국초등학교 탁구연행 회장기 대회 유치를 시작으로 전국 규모 대회도 네 차례나 유치했다. 그는 이처럼 모든 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보여줬던 제주도탁구협회의 노력과 열정에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출향 인사와 제주 발전 협업
그는 2008년 서울제주특별자치도민회장과 재외제주특별자치도민회 총연합회장에 각각 취임했다. 2년간 고향을 떠난 재외도민의 화합과 제주 발전을 지원하는 중추 역할을 맡았다.
실제 귤과 양배추의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폭락하자 대대적인 판촉 운동에 나서 제주 농민과 제주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제주 출신 사할린 동포와 출향 해녀들을 제주로 초청, 고향의 따뜻한 온정을 전하고 제주인의 정신을 세계적으로 알리고자 노력했다.
특히 제주 출신에게도 제주 방문 시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재외도민증 발급을 건의, 도외 제주인들의 자긍심과 고향 사랑 의지를 높여주었다. 또 2014년부터 지금까지 재단법인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서울 거주 회원 자녀는 물론 제주 출신 장학생 지원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서울제주도민회는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니다. 인적 자원이 풍부하다”며 “제주도정이 추진하는 일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도민회를 잘 활용해 달라”고 말했다. 한편 가족으로는 무용을 전공한 부인 임남식씨(68)와 2남.
관련자료
-
이전
-
다음